나는야 이방인 대학원생
내가 대학원을 가기까지 고민했던 이유 중 하나는, 아무런 연고가 없는 곳에서 혼자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대학원은 대부분 자대생(해당 학교 학부 졸업생)의 비중이 높고, 특히나 명문 대학원일수록 타교생들은 잘 안 받아주는 그런 문화가 있다고 들어서 엄청 겁을 먹고 있었다. 게다가 타교생은 조교를 구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이력서를 내더라도 자교생이 아니어서 그런지(아니면 학벌이 안좋아서그런지,,) 번번이 탈락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교수님들과 사전 컨텍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면접만 보고 들어왔기 때문에 쉽사리 도움을 구할 수도 없었다. 그래도 할 수 있는 모든 건 앞뒤 따지지 않고 도전했다. 그 결과, 다행히 1학기 시작 전 혼자 힘으로 조교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새벽 5시 기상, 매일 운동
입학 전 결심했다. 과거와는 다른 삶을 살겠다고, 과거를 절대 돌아보지 않겠다고. 그렇게 첫 개학날부터 새벽5시에 기상하여 학교를 갔고, 수업 끝나고 집에 오면 밤 11시 가까이 되는 생활을 1학기 정도 보냈다.
매일 운동하기 위해 학교 헬스장도 끊었다. 먼저 약해진 체력과 정신력을 다시 돌려놔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오래가지 못했다. 일단 수업관과 헬스장의 거리가 15분 정도 되었는데, 왔다 갔다 하는데 이미 체력이 바닥나버렸다. 게다가, 헬스장 보관함이 따로 없어서 매일 도시락이랑 헬스장 비품을 들고 다니는 것도 힘들었다. 아침에 운동하고 나면 오히려 더 지쳐서 공부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결국 2주 만에 헬스장은 환불하게 되었다. 대신에 집에서 홈트를 하거나, 주말에 걷는 등의 시간을 보내면서 체력 관리를 했다.
나는 여기 있을 자격이 없어
겉으로는 밝은 척을 해보려 했지만, 밤마다 뭔지모를 불안감이 엄습했다. 무슨 일이 계속 일어날 것만 같고, 내일 수업을 잘 못 알아들으면 어쩌지.. 와같은 쓸데없는 고민들을 뭉텅이에 모아놓은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그자리인 느낌이 들었다. 다른 학생들은 여유롭게 수업을 듣고, 원서 교재도 편하게 읽는 것 같은데, 나는 한 장을 읽는데 몇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다. 4~5시간 잠을 줄여가면서 이렇게 하는데 아무것도 나아진 게 없어 보였다.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여기 있을 자격이 없나 봐'.
처음 대학원에 입학했을 때, 가족들은 무슨 대학원에 들어가냐며, 차라리 취업을 하라고 했다. 그런데, 그렇게 회사를 위해 일했지만, 잘렸다. 회사에 올인하는 삶이 과연 맞는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큰마음을 먹고 대학원에 입학한 것인데, 정말 가족들의 말처럼 나의 생각이 잘못된 걸까.
그렇게 풀리지 않는 의문을 찾던 중 TED의 한 강의를 보게 되었다.
이 강의를 듣고, 나도 강연자와 같이 울게 되었다. 강연자도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 이후로 나의 생각 방식과 태도를 바꾸기로 했다. '나는 여기 있을만한 사람이야', '잘 극복할 수 있어'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나기
나는 학교 상담센터에서 상담을 받기도 했다. 당시 어떤 검사를 받았는데, 검사 결과 자살 수치가 너무 높게 나왔다고 상담원분이 조심스럽게 나에게 힘든 일이 있냐고 물어보았다. 그때 갑자기 눈물이 나왔다. 열심히 일했던 회사에서 내버려진 이야기를 했다. 처음이었다. 그동안 나는 주변에 힘든 티를 내지 않았다. 근데, 처음 보는 상담원에게 진심을 털어놓으니, 처음에는 '내가 왜 그러지?' 하면서도, 나중에 후련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뒤로 나는 조금씩 그 상처를 극복할 수 있었고, 지금은 웃으면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되었다. 그때는 어린 나이에 이해할 수 없었던 일들이었고, 원망도 많았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오히려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내가 그런 시련을 겪지 않았더라면, 계속 그 회사에 다니고 있었을 것이고, 우물 안 개구리처럼 하루하루를 살았을 테니까. 나중에 나이가 들어 취업도 어려울 때 이런 상황이 생겼다면, 더 최악이었겠지 라는 생각을 하니 안심이 되었다. 나는 20대였고, 충분히 다시 도전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그때의 그 충격이 내 인생의 아주 큰 터닝포인트가 되었고, 그 뒤로 나는 더 많은 도전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조금 더 빨리 나를 잘라줬더라면 좋았을 텐데'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큭.
색안경
내가 다녔던 대학원은 다행히 타교 출신 비중도 어느 정도 있어서 그렇게 큰 차별은 느끼지 못했으나, 가끔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사람들이 보이긴 했다. 예를 들면, 각자의 실력을 보기 위해서라며 수업 첫 시간에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 쓰라는 교수님도 계셨다. 물론 좋은 학교를 나온 학생들의 학업 실력이 뛰어난 것은 인정하지만, 처음부터 '얘는 OO대 나온 애'이런 식의 편견을 갖고 점수를 매긴다면 과연 객관적인 점수를 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상처 받았다. 객관적인 기준도 아닌, 주관적인 판단으로 나중에 자교 생들에게 더 높은 점수를 준 것을 보고, 이 색안경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깨달았다. 오히려 정교수이신 분들은 자교, 타교생 구분 없이 다 잘 대해주시는데 유독 그 교수님만 그런 태도를 취하셨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조금 시간이 지나 그분은 학교 정교수님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왜 그렇게 행동하셨는지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아마 그건 자신의 현실과 이상향의 괴리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수업시간에도 현실 얘기보다 화려했던 본인의 과거를 더 많이 이야기하셨다. 그러면서, 후회 섞인 말을 하면서 한숨을 쉬시던. 좋은 학교, 회사를 나오고 해외에서 공부까지 했지만 결국 정교수가 되지 못한 분들은 대학교에서 강사를 하게 된다. 회사에서도 박사학위 경력자를 부담스러워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면, 정말 애매해지게 되는 것이다. 학교에서 강사를 하기엔 너무 나이가 많고, 그렇다고 회사에 다시 들어가기엔 너무나 늦은.
학부 때 좋은 성적을 받고, 좋은 곳에 취업했다가 다시 공부를 위해 대학원에 오신 분들도 계셨다. 다들 교수라는 꿈 하나를 바라보고 들어오신 분들인데, 한해 정교수 티오가 거의 없다. 그럼 전국을 돌아다니며, 강사로 경력을 쌓아야 하는데, 말이야 쉽지 사실상 강사들의 처우가 너무나 열악하다. 강사법이 생기긴 했지만, 오히려 그 법 때문에 강사의 자리가 더 없어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 나는 박사까지 나와도 취업이 힘들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고작 석사에 불과하지만, 석사도 취업이 어려울 것은 불 보듯 뻔했다. 그래도, 나는 지금의 이 도전이 내 인생을 분명 바꿀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인생을 바꾸기 위해서는 좀 더 나 자신에게 집중해야 했다. 타인의 시선이 아닌, 나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연습을 처음 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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